명절 전 하루 배송을 기대하며 주문한 책이 다 늦게 왔다. 결국 지금에서야 들쳐보고 있는데 그 중 체호프 단편선을 제일 먼저 읽었다. 성격이 급해서 그런지 난 단편 소설을 좋아한다. 단편집 몇 개를 읽고 나면 마치 수십 개의 엄청난 문학작품을 읽은 것 같은 뿌듯함이 들기고 하고. ㅎㅎ
이번에 산 건 포켓북으로 나온 7천원짜리 저렴한(재생지를 사용한 책..가벼워서 좋다) 체호프 단편선 2 인데 주옥같은 그의 단편들이 한 데 묶여 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골짜기> <귀여운 여인> < 약혼녀> 등을 모아두었다.<상자 속의 사나이>라는 건 읽어보지 못하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단편들이 모아 있는 이 가벼운 책을 언제든지 들고 다니면서 읽어야겠다 라는 생각도 있었기에 고른 것.
역시 그의 단편들은 재밌다 라고만 이야기하기 미안할 정도로 재미있다. 오렌카, 얄로힌, 세르게예브나, 야크시니야 등 혀를 깨물것 같은 읽기 어려운 이름들만 빼고는 단숨에 읽어내리게 된다.
단편소설의 거장, 안톤 체호프.
그의 주옥같은 단편들은 너무나 많지만 특히 내가 좋아하는, 누구나 좋아하겠지만 <귀여운 여인>이 들어있어서 무엇보다 좋았다. 읽어보지 못한 <상자 속의 사나이> 가 궁금하긴 했지만 시동을 걸 요량으로 제일 먼저 <귀여운 여인>을 읽었다. 굉장히 여러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미소지으며 읽게 된다.
톨스토이가 10번이나 소리 내어 읽었다는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
읽고 있으면 붉게 상기된 귀여운 미소의 뚱뚱하고 키가 큰 귀여운 여인 오렌카 아줌마가 떠오르는 것 같다. 사랑하지 않고는, 사랑을 쏟아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오렌카 아주마의 푼수끼와 넓은 오지랖에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는 정말 '귀여운 여인'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문장 하나 하나가 읽어나가는 것이 아까워 읽고 또 읽게 된다.
[마침내 그녀는 쿠킨의 불행으로 인해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사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낯이 익은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야말로 연극이라는 점을 말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쿠킨이 말하듯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구경꾼들이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녀도 역시 연극의 소중함을 구경꾼들이 어떻게 알까 하고 걱정했다.]
연극제작가인 쿠킨이 사망 후 슬픔에 젖어 있던 오렌카가 목재상인 푸스토바로프를 만났을 때..
[ 그는 아주 잠깐 동안, 10분 쯤 머물렀을 뿐으로 말도 몇 마다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것이 보통 연정이 아니어서 그녀는 그날 밤 뜬 눈으로 지새웠다.]
[그녀는 자기가 벌써 오래전부터 재목상을 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재목처럼 여겨졌다...."...연극이 뭐 그렇게 좋은 것이라고요.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인 것을요"]
두 번째 남편인 푸스토바로프마저 병으로 사망 후 모든 의욕을 잃고 늙어갈 때 오렌카를 다시 사랑의 기쁨으로 빛나게 한 것은 바로 친하게 지내던 수의사의 아들 사샤이다. 사샤를 통해 극진한 모성애를 경험하며 그 때 비로소 오렌카는 본인의 생각, 주관을 이야기 하게 된다.
[오렌카는 사센카와 이야기를 하면 금방 가슴이 따뜻해지고 달콤하게 저려오는 것이 마치 이 소년이 자신이 낳은 아들인 듯 여겨졌다.]
[그녀에게는 전혀 남이지만, 이 소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내동댕이쳐도 전혀 아깝지 않을 것만 같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쁨에 넘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목숨을 바칠 것이다. 무슨 이유로 그녀에게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그 이유를 누가 알겠는가? ]
혹시라도 사샤의 어머니가 아들를 데리러 올까봐 노심초사하며 사샤에 대한 좋은 상상들을 하며 흐뭇하게 잠자리에 드는 이 중년의 여인이 귀엽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소설의 끝도 어찌나 귀엽게 끝나는지..
그 귀여운 풍경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체호프는 삶의 난데없는 순간들의 이야기를 단편으로 재미있게 풀어놓는다. 또는 어떤 어리석은 작은 일들이 큰 사건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던가 하는 희극스러운 단편들이 많은데 이런 풍자와 유머를 보고 있으면 무표정한 그의 사진 속에 숨어있는 익살맞은 미소를 찾게 된다.
그래서인지 체호프의 단편들을 읽으면 인물의 불안한 심리, 속물적인 인물들, 어리석은 사건들을 비웃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한 마음으로 이야기와 그 인물들을 바라보게 된다.
(왠지 미국작가 로알드 달도 체호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그의 단편들을 보면 기괴하고 익살스러움이 넘치는데...)
정말 러시아에는 위대한 작가도 위대한 음악가도 많은 것 같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고리끼, 푸쉬킨 또 누가 있나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광활하고 쓸쓸한 대지 속에서,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오히려 뜨거운 예술은 꽃피우나보다.
아니면 누구 말대로 러시아 사람들에 피 속에는 예술의 엄청난 DNA가 심어져 있던가...
체호프의 단편들을 읽다가 그런 생각들까지 하게 되는..그런 밤이다.
자야지..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데